일상

이곳을 지나, 다음을 향해

어떤 길은 오래 걸어도 정이 들지 않고, 어떤 길은 짧게 스쳐도 마음 깊이 남는다.

의정부성모병원에서의 시간은 후자였다. 짧았지만, 오래 기억될 시간.

펠로우를 마치고 대학병원에 남을지 떠날지 고민이 많았다.

수술은 익숙해졌고, 진료도 한층 안정감을 찾았지만, 여기서의 배움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곳에 온 이유를 곱씹어보니, 남아야 할 이유가 흐려진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운이 좋았다.

펠로우 시절,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 많은 걸 배웠다.

수술실에서, 외래에서, 때로는 사소한 대화 속에서도 그분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세밀한 부분까지 짚어주셨다.

“이런 걸 여쭤봐도 되나?”

싶었던 질문들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 받아주셨고, 직접 눈으로 확인할 기회를 주셨다.

그렇게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좋은 교육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했다.

가르침에 대한 고민

대학병원에 남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연구에 뜻이 있는 사람이 많지만, 나에게는 연구보다 “교육”이 더 중요한 질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 병원의 교육 시스템은 엉망이다.

특히 수술하는 과에서는 그 폐해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죽하면 안과의사들이 직접 인도로 가서 돈을 내고 백내장 수술을 배우는 코스까지 생겼을까…

수술 기회가 없으니 해외에서라도 배워야 하는 현실.

나 역시 이런 현실 속에서 전공의 생활을 보냈다. 

수술은 결국 케이스 싸움이다.

많이 해본 사람이 잘할 수밖에 없다.

2~30년 전만 해도 전공의들이 다양한 수술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새내기 서전일수록 수술 기회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수술 기회가 적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더 나은 교육을 할 수 있을까?

“단 10케이스를 하더라도, 100케이스를 한 것처럼 집중하고 배울 방법은 없을까?”

그 고민이 깊어졌다.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많았고, 때론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렵게 깨달은 것들을 후배들에게 나름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나도 이걸 몰라서 이렇게 헤맸는데, 다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덜 헤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 주변에도 한 명쯤 있지 않나? 뭔가 깨달으면 막 설명하기 좋아하는 사람.

그래서 펠로우를 마치고 교육을 고민하며 이곳을 선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의정 갈등이 길어지고, 여러 현실적 문제들이 겹치면서 처음 가졌던 기대는 점점 흐릿해졌다.

막연한 아쉬움 속에서 교육 영상도 만들고, 블로그에도 열심히 포스팅했다. 

하지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러던 와중에, 처음 가졌던 목표와 현실의 간극이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떠나기로 했다.

의정부 성모병원에서의 시간

짧지만 강렬한 시간이었다.

병원마다, 그리고 지역마다 특성이 다르다.

의정부성모병원은 그야말로 경기북부의 최전선 병원이었다.

경기 북부의 넓은 지역을 아우르며, 양주, 연천, 포천, 철원까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병원은 그들에게 ‘믿음’이었고, ‘희망’이었다.

여기 처음 와서 과장님께서 이 병원 별명이 돌담병원이라고 농담을 하셨는데,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이 병원이 문을 연 해가 1957년

거의 70년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환자들이 이곳을 찾았고, 또 믿었다.

나도 그 속에서 나름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후회는 남는다.

더 잘할 수 있었을까?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었을까?

진료실에서, 수술방에서, 외래에서 문득문득 이런 고민이 들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내게 그런 고민을 처음으로 던져준 시간이었다.

아직 마무리하고 싶은 환자들이 많았다.

그 아쉬움 속에서 후임 선생님께 인계할 내용을 정리하면서, 더 이상 내 손으로 진료를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실감됐다.

인계서를 적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도 무거워졌다.

떠남,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제, 떠난다. 그리고 더 시골로 간다.

여러 병원을 면접 보러 다니며 고민도 많았다.

어디든 저마다의 매력이 있었고, 또 그만큼의 고민이 따랐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여기에 남아도 처음 가졌던 목표를 찾을 수는 없겠는 생각이 들었다(복잡한 이유…)

익숙한 길을 떠난다는 건 언제나 쉽지 않다.

하지만, 떠남은 곧 새로운 배움의 시작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경험과 고민들을 잊지 않으며, 다음 장소에서도 여전히 고민하고, 배우고, 나아가려 한다.

어쩌면 병원은 사람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어떤 곳은 오래 머물러도 익숙해지지 않고, 어떤 곳은 짧게 머물러도 마음에 깊이 남는다.

의정부성모병원에서의 시간, 그리고 그곳에서 배운 고민과 질문들.

이제 떠나지만, 그 기억은 오래 함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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