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독후감] 진료실에서 만나는 논어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삼성 코엑스에서 열린 추계 대한안과학회를 다녀왔다. 평소 집과 진료실을 오가는 일상에 익숙해진 나는 오랜만의 대중교통 여행을 떠나는 설렘 속에서 긴 이동 시간을 어떻게 채울까 고민했다. 그렇게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을 골랐다. 황영훈 선생님이 쓴 “진료실에서 만나는 논어”였다.

책을 손에 든 순간, 제목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잠시 주저했지만, 요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과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의사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기며, 이 책이 그저 지침서가 아니라 진료실에서 부는 바람과 같은 깊은 성찰의 시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황영훈 선생님은 녹내장 분과의 안과 의사로, 2020년에는 “녹내장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집필하셨다. 당시 블로그에 안과 질환을 포스팅하던 나로서는 그 책을 읽고, “아, 이런 식으로 쉽게 풀어낼 수도 있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언젠가 나도 이런 책을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일까, 이번 책을 읽는 동안은 오래된 벗과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책은 얇아 한두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곱씹을수록 깊이를 더해 며칠에 걸쳐 읽게 되었다. 한 마디, 한 문장이 날카로운 가르침이 되어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고, 때론 부드럽게 나를 감싸주기도 했다.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 가지기

[독후감] 진료실에서 만나는 논어

“내가 틀릴 수 있다.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나를 비우고,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지 모른다.”

이 문장은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며 나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다행히 외래 진료에 큰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 편이다. 물론 누군가는 “아직 어려서 그래, 아직 뭘 몰라서 그래”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나름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진료를 하고 있다. 주변 동료 의사들 중에는 외래 진료를 유독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타고난 성격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 성격의 직업에 맞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을 걸으며 끝내 수련 도중 포기하는 이들도 종종 본다. 그들을 볼 때면 안타까움이 스친다.

그래서일까, 외래와 수술이 적절히 섞이고 타과와 비교적 독립적인 안과라는 분야가 내게 잘 맞아 늘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한타임(4시간) 40~50명의 환자를 보는 외래 시간 속에서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거나 속으로 화를 내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외래가 끝나면 으레 찾아오는 후회. “왜 그랬을까? 내가 틀릴 수도 있는데, 환자들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텐데…”

진료실은 환자와 의사가 삶의 이야기를 교차하는 공간이다. 환자가 불친절하거나 보호자가 지나치게 냉정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올라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되면,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각자의 사정”이라는 말의 무게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평온한 마음 가지기

[독후감] 진료실에서 만나는 논어

이 책은 또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전임의 시절 지도해주셨던 현준영 교수님.

교수님의 외래와 수술은 차분함과 정확성의 교본 같은 시간이었고, 그 모든 순간은 진료와 의술의 이상향처럼 보였다. 환자들에게는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설명으로 즉각적인 이해와 만족을 주었고, 수술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교수님의 수술은 늘 같았다. 쉬운 케이스든 어려운 케이스든,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시작해 같은 방식으로 끝났다. 마치 완벽히 조율된 오케스트라처럼.

한 번은 회식 자리에서 조심스레 물었던 기억이 난다. “교수님은 어떻게 항상 수술방에서 그렇게 평온하신가요?” 교수님은 웃으며 답하셨다.

“속으로는 완전히 싸우고 있어. 나 자신 빼고는 다 적이야.”

그 답을 듣는 순간, 그 평온함이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끊임없는 단련과 경험으로 얻어진 굳은살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책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평온은 다양한 경험과 끊임없는 단련을 통해 얻어지는 굳은살 같은 존재이다. 반면, 겉으로만 느긋한 평온은 살얼음 같아 작은 자극에도 쉽게 깨진다.”

나는 지금도 굳은살을 만드는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어렵다며 찾아올 때의 부담감, 예기치 못한 합병증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때… 이 모든 것이 나를 단련시키는 시간임을 이제는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처음 의욕에 넘쳤던 나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이 자리 잡았다. 이 모든 경험이 결국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과 의사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책 내용을 많이 보여줄 수 없지만, 후반부에 더 좋은 내용이 많다.

진료실에서, 수술방에서, 그리고 삶의 여러 순간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는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나의 굳은살도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